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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works
나의 아쿠아리움 : 제0의 성
 
추수
2020
디지털 프린트 100cm x 100cm, 가상 설치
사진 ii eun
모델 빛하믹주, 안기환, 추수
모호한 젠더 정체성을 가진 생물들이, 그들이 태어난 서울의 포장되지 않은 모습을 배경으로 한 아쿠아리움에 살고 있다.
 
추수는 “젠더는 무한하게 다양하며,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는 수전 팔루디의 신념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나의 아쿠아리움 : 제0의 성>은 생물학적 몸 안에 살아 숨쉬는, 복잡한 우리 정신의 젠더를 뚜렷이 마주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독히 가부장적인 서울에서 나고 자라, 이분법적 젠더 구분을 가장 격렬히 거부하는 세대로 거듭난 청년들의 몸. 그리고 그들은 인간 중심의 성별 해석에서 벗어나는 자웅동체 생물들과 함께 아쿠아리움의 생태계를 이룬다.
© TZUSOO
Portrait of Avatar My Aquarium : The Zero Sex Schrödinger's Baby Prude Boys of Stuttgart The Holy Waterfall Tombstone Who Gurads The Museum Bosch Piercing Pulp Nonfiction Deep Kiss World 100 Sales=1,500 Euro Tuition Fee Sink Tank The Holy Water Bottle Play For Everyone Masobox Drawings When I Was 7 Years 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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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 Hygienic Exhibition>, online space Second Life, 2020
 
at Oberwelt e.V., Stuttgart, Germany, 2020
 
 
 
비정상abnormal의 몸으로 가상의 수조에서 헤엄치기
 
 
 
새로운 기술 앞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한다. 내게 아직 미지인 어떤 기술이, 내가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한계 상황들을 초월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 낯선 기술에게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모두 내어주는 게 과연 인간적인가? 추수tzusoo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그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어떤 가상 공간에 존재하는, 우리가 가져본 적 없는 이미지적 유토피아.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다. 가상 공간 속 우리 몸이 얼마나 해방되었고 자유로우며, 우리가 사는 실제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정상성이나 규칙들에 얽매어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기술 또한 인간이 만든 것이라,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 수록 나는 다시 인간적인 한계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가상 세계가 현실에 위성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추수의 믿음이 어느 방향에서 출발해왔는지 나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이 글은 그의 시선과는 조금 엇비슷할 방향을 가로질러 비슷한 층위에 도달하기를 시도한다.
 
 
 
File - Open: queer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적 믿음 탓에 우리는 계속해서 정상성을 답습한다. 성기 중심적으로 인간을 둘로 나누고, 몸의 정상성을 규정하여 비정상을 구분하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따른다는 말이다. 스스로를 퀴어로 정의하거나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계몽의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인간은 이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경험하고 배워온 것들을 한순간에 ‘없던 셈’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가 기다리는 때는 오지 않았다. 누구나 태어나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에서부터 비너스나 아레스의 기호를 부여 받는다. 이름을 바꾸거나 성별을 고친다고 해서 그 기억들과 그 순간들을 기억하는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새롭게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퀴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떠올리는 것은 그런 기억들이 관습이 되고, 또 다시 전통으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실천이다. 그래서 내게 퀴어는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퀴어를 실천하는 일은 오히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는 일이고, 하루하루 이에 저항하기를 반복하는 웨이트 트레이닝과 같다. 여느 트레이닝이 그런 것처럼 이런 운동은 종종 공회전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background — locked 
 
가상 공간은 얼핏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몸이든 선택할 수 있다. 성별이라곤 도무지 중요해보이지 않는 만질 수 없는 몸의 세계로, 몸의 그 어떤 부분도 기능하지 않는 세계로 진입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몸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피부색이나 성별, 눈과 입의 모양이나 키 같은 것을 커스터마이징한다. 현실에서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이런 커스터마이징은 ‘가능성’처럼 보인다. 앞서 말한 실천으로서의 퀴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몸 말고 다른 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불가능을 마주한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조차 남성이나 여성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나 종족을 골라야 한다는 것, 상아색에서 초콜릿색의 스펙트럼에서 피부색을 골라야 한다는 것. 가상 세계별로 이런 가능성은 제한되거나 더 열려있지만 우리가 아바타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그런 인간의 형태를 갖는다. 아직 전통을 거절하지 못한 인간의 형태를. 그래서 남성 캐릭터는 종종 여성 캐릭터를 위해 디자인된 의상을 입을 수 없으며—기술적인 문제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모두 깨달은 바와 같이 어디서든 지나치게 성애화된 아바타를 마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가상 현실은 무한한 가능성을 어쩌면 포기했다. 종종 우리는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몸을 자신으로 선택한다. 우리의 아바타는 수십번을 상처 입고, 심지어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멀쩡한 몸으로 움직인다. 그의 움직임은 날렵하며 어쩐지 벗을 수록 더욱 강해지곤 한다. 그의 몸은 온전히 심미적인 기준으로 발달된 근육이나 과장된 가슴을 갖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종 혹은, 그래서 대부분 아바타를 만들 때 현실에서 갖지 못한 것들을 조합해 만든다. 경험해보지 못한 육체, 겪어보지 않은 미적 형태로 새로운 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만들어진 새로운 몸은 나의 기호가 되어 가상 현실을 부유한다. 이렇게 도달한 가상 현실은 지구의 그림자가 진 달이 된다. 가상 공간의 불가능성은 그를 오랜 시간 유토피아라는 단어로 포장했던 것이 결국 인간의 세속적 욕망이었다는 사실만을 고백한다는 말이다. 
 
 
 
 
 
*
 
 
 
 
 
layer 1: <나의 아쿠아리움> 
 
추수의 <나의 아쿠아리움>은 이런 포기와 불가능에 저항한다. 이는 앞서 말한 유한한 인간의 몸, 그리고 계속해서 이로 회귀하고자하는 인간적 욕망으로의 이행을 거부한다. 인간은 알 수 없는—도저히 어떻게 기능하는지 알 수 없는—형태의 몸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가상 현실에서 오브제가 되기도 하고, 구조물이 되기도 한다. 숨은 쉬고 있을까? 이런 질문도 기능하지 않는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도 전제되는 인간의 유한함을, 추수의 번역된 초상은 거부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어떤 생물과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살아있지 않은 것들을 닮았다. 
 
이것이 몸의 정상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추수의 번역된 초상은 퀴어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한다. <나의 아쿠아리움>은 일상 속에 존재하는 퀴어한 몸을 단순히 포착함으로, 오히려 퀴어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일을 복합적으로 묘사한다. ‘비정상’이기에 퀴어한 가상의 몸은 퀴어를 실천하는 ‘정상’의 현실 속 몸에 대치한다. 퀴어한 몸이 담긴 일상적 공간은 그가 자라난 정상성의 세계를 드러낸다. ‘double’인 초상은 그래서 서로를 ‘대리보충supplement’한다. 현실 속 퀴어한 몸은 가상의 몸으로 번역되며, 그것이 약속한 유토피아적 해방의 가능성을 본다. 가상의 몸은 현실 속 퀴어한 몸에 연결되며, 나아가 현실의 몸을 갖기를 꿈꾼다. 서로를 ‘대리보충’하는 이 ‘double’은 더 이상 가상 현실을 대안적 가능성이나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할 수 없게 한다. 번역된 초상 속 ‘double’은 이미 그 경계를 떼어내기 어려울 만큼 연결되고 뒤섞이고 끈끈하게 서로 붙잡혀있다. 
 
 
 
 
<Ultra Hygienic Exhibition>, online space Second Life, 2020
 
 
 
비정상abnormal의 몸으로 가상의 수조에서 헤엄치기
 
 
 
 
 
 
 
새로운 기술 앞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한다. 내게 아직 미지인 어떤 기술이, 내가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한계 상황들을 초월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 낯선 기술에게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모두 내어주는 게 과연 인간적인가? 추수tzusoo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그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어떤 가상 공간에 존재하는, 우리가 가져본 적 없는 이미지적 유토피아.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다. 가상 공간 속 우리 몸이 얼마나 해방되었고 자유로우며, 우리가 사는 실제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정상성이나 규칙들에 얽매어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기술 또한 인간이 만든 것이라,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 수록 나는 다시 인간적인 한계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가상 세계가 현실에 위성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추수의 믿음이 어느 방향에서 출발해왔는지 나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이 글은 그의 시선과는 조금 엇비슷할 방향을 가로질러 비슷한 층위에 도달하기를 시도한다.
 
 
 
File - Open: queer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적 믿음 탓에 우리는 계속해서 정상성을 답습한다. 성기 중심적으로 인간을 둘로 나누고, 몸의 정상성을 규정하여 비정상을 구분하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따른다는 말이다. 스스로를 퀴어로 정의하거나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계몽의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인간은 이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경험하고 배워온 것들을 한순간에 ‘없던 셈’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가 기다리는 때는 오지 않았다. 누구나 태어나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에서부터 비너스나 아레스의 기호를 부여 받는다. 이름을 바꾸거나 성별을 고친다고 해서 그 기억들과 그 순간들을 기억하는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새롭게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퀴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떠올리는 것은 그런 기억들이 관습이 되고, 또 다시 전통으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실천이다. 그래서 내게 퀴어는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퀴어를 실천하는 일은 오히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는 일이고, 하루하루 이에 저항하기를 반복하는 웨이트 트레이닝과 같다. 여느 트레이닝이 그런 것처럼 이런 운동은 종종 공회전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background — locked 
 
가상 공간은 얼핏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몸이든 선택할 수 있다. 성별이라곤 도무지 중요해보이지 않는 만질 수 없는 몸의 세계로, 몸의 그 어떤 부분도 기능하지 않는 세계로 진입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몸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피부색이나 성별, 눈과 입의 모양이나 키 같은 것을 커스터마이징한다. 현실에서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이런 커스터마이징은 ‘가능성’처럼 보인다. 앞서 말한 실천으로서의 퀴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몸 말고 다른 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불가능을 마주한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조차 남성이나 여성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나 종족을 골라야 한다는 것, 상아색에서 초콜릿색의 스펙트럼에서 피부색을 골라야 한다는 것. 가상 세계별로 이런 가능성은 제한되거나 더 열려있지만 우리가 아바타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그런 인간의 형태를 갖는다. 아직 전통을 거절하지 못한 인간의 형태를. 그래서 남성 캐릭터는 종종 여성 캐릭터를 위해 디자인된 의상을 입을 수 없으며—기술적인 문제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모두 깨달은 바와 같이 어디서든 지나치게 성애화된 아바타를 마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가상 현실은 무한한 가능성을 어쩌면 포기했다. 종종 우리는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몸을 자신으로 선택한다. 우리의 아바타는 수십번을 상처 입고, 심지어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멀쩡한 몸으로 움직인다. 그의 움직임은 날렵하며 어쩐지 벗을 수록 더욱 강해지곤 한다. 그의 몸은 온전히 심미적인 기준으로 발달된 근육이나 과장된 가슴을 갖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종 혹은, 그래서 대부분 아바타를 만들 때 현실에서 갖지 못한 것들을 조합해 만든다. 경험해보지 못한 육체, 겪어보지 않은 미적 형태로 새로운 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만들어진 새로운 몸은 나의 기호가 되어 가상 현실을 부유한다. 이렇게 도달한 가상 현실은 지구의 그림자가 진 달이 된다. 가상 공간의 불가능성은 그를 오랜 시간 유토피아라는 단어로 포장했던 것이 결국 인간의 세속적 욕망이었다는 사실만을 고백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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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er 1: <나의 아쿠아리움> 
 
추수의 <나의 아쿠아리움>은 이런 포기와 불가능에 저항한다. 이는 앞서 말한 유한한 인간의 몸, 그리고 계속해서 이로 회귀하고자하는 인간적 욕망으로의 이행을 거부한다. 인간은 알 수 없는—도저히 어떻게 기능하는지 알 수 없는—형태의 몸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가상 현실에서 오브제가 되기도 하고, 구조물이 되기도 한다. 숨은 쉬고 있을까? 이런 질문도 기능하지 않는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도 전제되는 인간의 유한함을, 추수의 번역된 초상은 거부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어떤 생물과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살아있지 않은 것들을 닮았다. 
 
이것이 몸의 정상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추수의 번역된 초상은 퀴어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한다. <나의 아쿠아리움>은 일상 속에 존재하는 퀴어한 몸을 단순히 포착함으로, 오히려 퀴어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일을 복합적으로 묘사한다. ‘비정상’이기에 퀴어한 가상의 몸은 퀴어를 실천하는 ‘정상’의 현실 속 몸에 대치한다. 퀴어한 몸이 담긴 일상적 공간은 그가 자라난 정상성의 세계를 드러낸다. ‘double’인 초상은 그래서 서로를 ‘대리보충supplement’한다. 현실 속 퀴어한 몸은 가상의 몸으로 번역되며, 그것이 약속한 유토피아적 해방의 가능성을 본다. 가상의 몸은 현실 속 퀴어한 몸에 연결되며, 나아가 현실의 몸을 갖기를 꿈꾼다. 서로를 ‘대리보충’하는 이 ‘double’은 더 이상 가상 현실을 대안적 가능성이나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할 수 없게 한다. 번역된 초상 속 ‘double’은 이미 그 경계를 떼어내기 어려울 만큼 연결되고 뒤섞이고 끈끈하게 서로 붙잡혀있다. 
 
 
 
 
 
 
at Oberwelt e.V., Stuttgart, Germany, 2020
 
EN
EN
layer 2: <초-위생 전시>
 
이미지가 스스로 디지털 이미지임을 숨기지 않을 때 디지털의 텍스처는 새로운 질서를 암시한다. <나의 아쿠아리움>의 전시 상황인 <초-위생 전시>에서 관객은 이 새로운 질서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고 유희한다. 관객은 추수의 전시를 보기 위해 새로운 플랫폼에서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몸을 만들어 입장한다. 익숙하게 다뤄본 적 없는 이 플랫폼에서 관객들은 제대로 된 몸을 만드는 것에 실패하고,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실패한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사는 여러 관객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데에도 실패한다. 추수는 자신의 전시장에서 관객에게 누구냐고 묻는 일을 반복한다. 
 
인간의 몸은 모두 어떤 기능을 위해 고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몸은 모든 부분들이 어떻게든 ‘기능’한다. 위장이 음식을 소화하고 피가 산소를 운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피부는 신체를 보호하고 근육은 신체를 움직이기 위해 기능한다. 성은 번식에 기여한다. 인간이 이를 자신들의 세계에서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유희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최초의 목적은 신체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상 현실 속 아바타는 ‘불가능의 몸’이다. 아바타는 색의 데이터로 구성된 실루엣outline으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성별이 존재한다고 해서 번식할 수 없으며 서로를 만질 수조차 없다. 그의 근육은 움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바타를 움직이는 것은 사용자의 방향키이지, 아바타의 뼈나 근육이 아니다. 아바타는 인간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흉내냄으로 이를 ‘가능성’처럼 포장해낸다. 하지만 추수의 전시 속에서 드러나는 아바타, 가상의 몸은 그 ‘가능성’의 허상을 보란듯이 무너뜨린다.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여기가 어딘지도 알지 못한다. 판데믹이 가져온 무력감은 이런 가상 현실의 ‘불가능성’과 닮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가상 현실 속 몸은 무력하지 않다. <초-위생전시>의 관객들은 실패를 반복하며 유희한다. 신체의 기능에 저항하는 아바타의 실패는 다시 말해 정상성에의 저항을 의미한다. 같은 의미에서 퀴어는 공회전하며 이를 유희한다. 실패하는 여러 아바타의 몸들 위로 <나의 아쿠아리움>의 오브제와 사진이 떠 있다. 그럼 이제 추수의 아쿠아리움은 나의 스크린으로, 스크린 속 몸을 조작하는 나의 몸으로까지 확장된다. 
 
 
 
Merge layers
 
<나의 아쿠아리움> 속 생물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된다. 이는 퀴어라는 단어로 약속한 자유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가상 공간의 불가능성’은 <나의 아쿠아리움>에서 배반되어 <초-위생 전시>를 통해 확장된다. 내가 도달한 추수의 아쿠아리움은 우리의 가능을 말하는 가상 공간의 불가능이다. 우리에게 유토피아적 자유의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이 기술이 아니라는 이 불가능성은, 이를 도래시킬 주체가 결국 우리 인간이라는 가능성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렇기에 가상 현실의 가능성은 우리의 가능성이다. 우리 퀴어We queer가 끊임없이 전통을 거절하기를 시도하고, 정상이라 이름 붙은대로 기능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번역하고 정의함을 의미하는. 이를 통해 누구도 배제시키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게 될 우리 인간의 가능성이다. 
 
추수가 무수히 반복한 그의 작업 속에서 수없이 리플레이되는 질문이 이 가능성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이는 어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이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 세계의 첫 번째 질문이다. 우리가 정상성의 전통을 답습하더라도 그것을 계속해서 방해할, ‘너는 누구’냐는 물음. 이 물음을 경유하여 저마다의 대답을 찾아내는 우리는 모두 퀴어가 된다.
 
 
글 라현진
layer 2: <초-위생 전시>
 
이미지가 스스로 디지털 이미지임을 숨기지 않을 때 디지털의 텍스처는 새로운 질서를 암시한다. <나의 아쿠아리움>의 전시 상황인 <초-위생 전시>에서 관객은 이 새로운 질서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고 유희한다. 관객은 추수의 전시를 보기 위해 새로운 플랫폼에서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몸을 만들어 입장한다. 익숙하게 다뤄본 적 없는 이 플랫폼에서 관객들은 제대로 된 몸을 만드는 것에 실패하고,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실패한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사는 여러 관객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데에도 실패한다. 추수는 자신의 전시장에서 관객에게 누구냐고 묻는 일을 반복한다. 
 
인간의 몸은 모두 어떤 기능을 위해 고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몸은 모든 부분들이 어떻게든 ‘기능’한다. 위장이 음식을 소화하고 피가 산소를 운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피부는 신체를 보호하고 근육은 신체를 움직이기 위해 기능한다. 성은 번식에 기여한다. 인간이 이를 자신들의 세계에서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유희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최초의 목적은 신체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상 현실 속 아바타는 ‘불가능의 몸’이다. 아바타는 색의 데이터로 구성된 실루엣outline으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성별이 존재한다고 해서 번식할 수 없으며 서로를 만질 수조차 없다. 그의 근육은 움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바타를 움직이는 것은 사용자의 방향키이지, 아바타의 뼈나 근육이 아니다. 아바타는 인간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흉내냄으로 이를 ‘가능성’처럼 포장해낸다. 하지만 추수의 전시 속에서 드러나는 아바타, 가상의 몸은 그 ‘가능성’의 허상을 보란듯이 무너뜨린다.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여기가 어딘지도 알지 못한다. 판데믹이 가져온 무력감은 이런 가상 현실의 ‘불가능성’과 닮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가상 현실 속 몸은 무력하지 않다. <초-위생전시>의 관객들은 실패를 반복하며 유희한다. 신체의 기능에 저항하는 아바타의 실패는 다시 말해 정상성에의 저항을 의미한다. 같은 의미에서 퀴어는 공회전하며 이를 유희한다. 실패하는 여러 아바타의 몸들 위로 <나의 아쿠아리움>의 오브제와 사진이 떠 있다. 그럼 이제 추수의 아쿠아리움은 나의 스크린으로, 스크린 속 몸을 조작하는 나의 몸으로까지 확장된다. 
 
 
 
Merge layers
 
<나의 아쿠아리움> 속 생물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된다. 이는 퀴어라는 단어로 약속한 자유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가상 공간의 불가능성’은 <나의 아쿠아리움>에서 배반되어 <초-위생 전시>를 통해 확장된다. 내가 도달한 추수의 아쿠아리움은 우리의 가능을 말하는 가상 공간의 불가능이다. 우리에게 유토피아적 자유의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이 기술이 아니라는 이 불가능성은, 이를 도래시킬 주체가 결국 우리 인간이라는 가능성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렇기에 가상 현실의 가능성은 우리의 가능성이다. 우리 퀴어We queer가 끊임없이 전통을 거절하기를 시도하고, 정상이라 이름 붙은대로 기능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번역하고 정의함을 의미하는. 이를 통해 누구도 배제시키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게 될 우리 인간의 가능성이다. 
 
추수가 무수히 반복한 그의 작업 속에서 수없이 리플레이되는 질문이 이 가능성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이는 어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이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 세계의 첫 번째 질문이다. 우리가 정상성의 전통을 답습하더라도 그것을 계속해서 방해할, ‘너는 누구’냐는 물음. 이 물음을 경유하여 저마다의 대답을 찾아내는 우리는 모두 퀴어가 된다.
 
 
 
 
 
글 라현진